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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실 나, 네가 엄청 필요해

by ddawoori 2024.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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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2018년 펴낸 첫 소설집으로 많은 젊은 독자들을 매료시킨 박상영의 두번째 책. 제10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비롯해 발표와 동시에 화제를 모았던 4편의 중단편을 수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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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 오전의 공항철도는 놀라울 만큼 한산했다. 창밖으로 회색빛 갯벌과 밑동만 남은 마른 작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이곳이 인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천 하면 유설희지" . 갑자기 떠오르는 규호의 목소리. 같이 다니자 유설희, 유설희 간호학원.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다 갑자기 부끄러워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오직 다 식어버린 고로케만이 아직도 내 손에 들려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규호의 이빨 자국이 난 고로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신나는 노래를,  굳이 카이리 미노그나 티아라 같은 노래를 듣고 싶은데 하필 핸드폰 배터리가 다 떨어져 버렸네. 이럴 때면 규호가 보조 배터리를 내밀곤 했었는데, 그것뿐인가. 아침마다 약과 물을 챙겨주고, 입술이 갈라지면 립밤을 건네주고, 내 방에 암막 커튼도 달아주고, 간지러운 등도 긁어주고, 나보다 먼저 욕실에 들어가 공기를 데워놓는 그런 사람은 너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사실 나, 네가 엄청 필요해 규호야...... 나는 자꾸만 흐려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울로,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도시로 향했다.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中 대도시의 사랑법 마지막 문단
 



언제까지 4년마다 이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까. 이제 애도 커가는데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되뇌며, 이삿짐을 정리했다. 아내와 나는 나름 독서를 취미로 여기며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터라 아직 집에 많은 책이 남아 있다. 이사를 계기로 가진책을 한번 정리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 가지고 있는 책 중 정말 눈길도 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책들을 골랐다. 40~50권은 족히 들어갈 박스를 가득채우고도 에코백 하나를 더 채울 만한 '중고책들'이 선별되었다.
 

중고책 판매시에 미리 확인해보고 가져가길

 
무거운 중고책을 낑낑거리며,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 팔았다. 점원에게 많은 책을 보여주자. '혹시 집에서 판매 가능여부 확인하고 오셨나요?' 알고 보니 책의 바코드를 알라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에서 찍으면, 중고책으로써 판매가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을 해준다고 한다. 세상은 이렇게 작은 부분도 자꾸 발전하는데, 나는 멈춰있었다. 여하튼 가지고 온 책의 반은 다시 낑낑대며 집으로 가져와 분리수거하는 날 '폐지'로 처분했다. 한때, 그래도 나나 아내가 읽었을 테고 분명 생각한 점이나 느낀 점이 있었던 책들이었을 텐데, 처분하는 그 순간, 마치 '잠깐 잊고 있었던 기억'을 그러니까 '어떤 계기만 있으면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는 내 생의 일부'를 내 스스로 영원히 폐기처분한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그 때 받은 중고서점에 판 헌책들은 23,500원이라는 소중한 마일리지로 환생하여 돌아왔다. 그 마일리지로 다시 산 책 중 하나가, 이번에 읽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박상영 작가를 처음 접한 건, 지금은 폐지된 좋은 프로그램인 '역사 저널 그날'에서였고, 사실은 내가 한때 매해 구매해서 읽었던 '젊은 작가 수상작'에서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라는 소설로 처음 작가를 접했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작품은 크게 기억이 남지 않았다.(이번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MZ작가(?)' 답게 방송 출연도 하고, 게다가 보통 작가들은 예민해서 마르고 목소리도 굉장히 힘이 없다는 내 나름의 편견이 존재했는데, 박상영 작가는 덩치도 크고 말도 시원시원하게 해서 '신기한데?'라는 생각으로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있었다. 또 최근에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까지 이 작품이 올랐다고 하기에 고민 없이 구매했다.
 


 
첫 장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 일반의 사랑이 아닌 게이의 사랑을 그렸기 때문인데, 딱히 그런 사랑에 대해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막상 소설이라는 허구라도 눈앞에서 직관하니 미간을 찌푸르면서도 계속읽게 되는 소설의 이상한 힘 이끌렸다고 해야 할까. 그 힘에 이끌려 책장이 막 넘어가다가, 마지막 문단에서 나도 모를 짧은 탄식이 나왔다.
 
사랑의 방향이 다르다고 해서 사랑의 마음이 다르지는 않다. 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잊고 살던 나를 깨달았다. 사실 상대가 이성이냐, 동성이냐는 크게 생각하면 절대 닿을 수 없는 차이이지만, 또 그 마음만 생각한다며 내가 아내에게 느끼는 감정과 주인공이 규호에게 느낀 감정이 아마 같았을 것이다.
 
마지막 문단을 몇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내와 아이가 없어서 못 사는 건 나다. 늦게 온다고, 과음한다고, 영양제 안 챙겨 먹는다고 달달 들들 볶는 아내가, 메일 목이 쉬고 넘어져 걱정하게 하고, 집에서 뛰어놀아 경비실에서 연락이 와 민망함을 더해주는 아이가. 나는 필요하다. 그러니까 사실 나, 너네가 엄청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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